미국행이 결정된 이후, 당당한 포닥 생활을 위해 국내에서 지원 가능한 펠로우십을 찾고, 지원했다. 미국은 포닥에게 한국보다는 더 높은 급여를 제공하는데, 펠로우십의 지원을 받는다고해서 포닥 기간 중 받는 연간 급여가 증액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연구 시설에서 포닥 연구자에게 지불하는 급여 중 일부를 우리나라의 지원 과제를 통해 보전해주는 방식이라, 연구자가 금전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다만, 이러한 펠로우십으로 인해서 해외의 연구 기관이 한국의 연구자들을 더 선호하게 되고, 또 과제의 지원을 받은 한국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급여의 상당 부분을 연구 기관이 아닌 한국에서 지급받는 셈이 되다보니, 조금 더 당당(?)하게 포닥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이 사실 매우 주요한 요소인 것 같다.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되는 만큼, 고용/피고용 관계에서 어느 정도 동등한 연구자로 인정받으면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지원한 펠로우십은 "세종 과학 펠로우십 - 국외 연수 트랙" 이었다. 해당 펠로우십은 "우수한 박사후연구자가 국가전략기술 분야 핵심 인재로 성장하여 국가경쟁력 확보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국외연수 지원" 을 목표로 1년간 연 7천만원을 지원한다. 기존에는 이보다 조금 더 긴 기간동안 지원했었지만, 올 해 기간이 1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핵심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에 맞게, 펠로우십 지원서는 국가에서 지정한 12개의 국가전략기술과 연구자가 앞으로 포닥 기관에서 수행할 연구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등을 요구했다. 내가 보기에는 12개의 국가전략기술이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해 보였다. 명확하게 정의된 것도 아니고, 적당히 넓은 범위를 갖는 몇 개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것들이라 적당히 썰만 잘 푼다면, 어떤 연구를 하건 12개 중 하나에는 해당될 것 같아 보였다.
보통의 국가 과제들이 그렇듯, 세종 과학 펠오우십도 연구 과제의 목적, 필요성, 연구 방법, 기대 효과, 활용 방안 등을 요구했다. 최근 회사에서 국가 과제에 지원하기 위해 작성했던 제안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나로써는 꽤나 친숙한 포맷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내는 직접 제안서를 써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좀 힘들어했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지원하는 과제 제안서는 대부분 학생들이 작성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학과마다 혹은 연구실마다 경향이 다른가보다.
사실 지원서의 포맷이야 나중에라도 변경하면 되는 것이고, 아내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부분은 실질적으로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다. 세종 과학 펠로우십 - 국외 연수 트랙의 지원서에는 포닥 연수 기간동안 진행하게 될 연구에 관하여 서술해야했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연구이다보니 내용을 채우기가 막막했다. 더군다나 내용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컨펌을 해줄 수 있는 교수는 시차가 13시간이나 되는 미국에 살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긴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중 가장 최악이었던 부분은 지원서를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작성해야한다는 점이었다. 한글로 지원서를 작성하고, 번역해서 교수와 논의하고, 피드백을 다시 한글로 반영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한국에 제출할 지원서 내용을 미국인 교수와 논의해야하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가 절망하고 있으면, "요즘 그런거 ChatGPT가 잘해" 라고 알려줬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또 GPT 타령이네' 라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고, 마감 기한에 가까워서는 ChatGPT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달에 $20면 훨씬 더 성능 좋은걸로 쓸 수 있는데..."
몇 번의 새벽잠을 포기하며, 몇 차례 미국의 교수와 메일을 주고 받기를 반복하더니, 지원서가 얼추 완성되었고, 이제는 요구하는 분량에 맞게 내용을 조절해야했다. 문서의 여백을 줄이고, 불필요한 말들을 걸러내어 최대한 내용을 주어진 분량에 욱여넣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수는 교수 나름대로 본인의 연구비를 위한 grant를 쓰는 중이었어서, 이래저래 모두가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연구 과제에 지원하는 시기가 비슷한가보다.
세종 과학 펠로우십 외에 한국의 다른 지원 사업들도 같은 시기에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건 사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는데, 지원서 제출 마지막 날,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제출하려는데, 서버가 터지면서 알게되었다. 덕분에 연구실, 연구지원팀 등등 여기저기 난리가 났던 것 같았는데, 아내는 미리 저장해둔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은 일찍 지원서 제출을 마무리했다. 여러 지원사업의 제출이 겹치는 날에는 서버에 트래픽이 몰린다는건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는데, 운영이 다소 아쉬웠다.
조금 더 알아보니 "세종 과학 펠로우십 - 국외연수트랙"은 신규로 선정되는 인원이 190명으로 정해져있다. 한 해에 외국으로 연수를 나가는 인원이 이렇게 많은가 싶었는데, 말을 들어보니 이미 외국에 나가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지원할 수 있어서, 경쟁률이 상당히 높을 예정이란다. 만약 여기에 선정되지 못하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다른 지원 사업에 지원해야한다. 이미 써 둔 지원서가 한 벌 있으니 지원서 작성이 조금이나마 수월하겠으나, 그 마저도 간단치만은 않은 일일 것이라 이번 지원 사업에 선정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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